정홍기 선교사 “루마니아 통해 남과 북 더 가까워지길 기대” 2020.9.24. 기독일보

작년 루마니아 선교단체인 카이로스 선교세미나에서 정홍기 선교사와 김성훈 선교사, 조요셉 목사가 강의한 후 훈련생들과 단체사진을 촬영했다. ©정홍기 선교사
“과거 북한과 정치, 외교, 문화 교류가 활발했던 루마니아는 아직 북한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습니다. 또 루마니아 교회는 오랜 시간 공산정권과 독재정권 아래에서 핍박받으며 공산주의 사상과 정신적 구조를 잘 압니다. 대다수 루마니아 복음주의 교회가 지금도 북한에 남다른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북한선교를 준비하는 이유입니다.”“과거 북한과 정치, 외교, 문화 교류가 활발했던 루마니아는 아직 북한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습니다. 또 루마니아 교회는 오랜 시간 공산정권과 독재정권 아래에서 핍박받으며 공산주의 사상과 정신적 구조를 잘 압니다. 대다수 루마니아 복음주의 교회가 지금도 북한에 남다른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북한선교를 준비하는 이유입니다.”
1991년 루마니아로 파송돼 루마니아에서 첫 장로교회를 개척한 정홍기 선교사는 루마니아 교회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북한선교에 간절함과 뜨거운 열정을 가진 이유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지난 9일 서울 마포구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정 선교사는 “루마니아 복음주의 교회들은 형제국이었던 북한과 옛날 우정을 새롭게 세우고, 친구 관계를 회복하기 원한다”며 “더 나아가 루마니아를 통해 남한과 북한이 더 가까워질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홍기 선교사는 “북한이 문호가 열리고 신앙과 종교의 자유가 생길 때를 대비하여 한국교회와 루마니아 교회가 북한선교를 공동으로 준비해 나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지희 기자 정홍기 선교사(후원교회 복된이웃교회)는 1986년 AFC(Ambassador for Christ) 선교회를 설립하고, 1988년부터 유럽단기선교 등 유럽선교운동을 이끌었다. 1989년 루마니아에서 민주화 혁명이 일어나자 이듬해 AFC 사역팀은 신속히 루마니아에 들어가 사역을 시작했고, 1991년 정홍기 선교사 부부가 장기선교사로 파송됐다. 2002~2003년에는 옥스퍼드 선교연구원에서 국제커뮤니케이션학을 공부했다.
루마니아 땅에 발을 디딘 지 올해로 28년이 된 정 선교사가 지향한 사역 목표는 세 가지였다. 한국과 루마니아가 함께 세계선교에 협력하고, 루마니아 복음주의 교단들의 연합과 협력을 이루며, 북한선교에 대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준비와 실행을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션 루마니아 2018’(Mission Romania 2018) 대회는 개인적으로 사역을 결산하는 자리와도 같았다. 정 선교사와 김성훈 독일 선교사(위클리프 선교회)가 함께 기획하고 주관한 이 대회에서는 루마니아복음주의협의회(REA)를 비롯해 침례교, 오순절, 형제들의 교회, 장로교 등 루마니아 전 개신교단, 주요 선교단체와 일반 대학과 한인 선교사, 한국의 선교단체와 목회자들이 함께 세계선교와 북한선교를 논의했다. 대회 이후 루마니아 교회와 한국교회의 협력 관계와 북한선교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영향으로 6개월간 루마니아 국경이 폐쇄되고 루마니아 교회도 온라인 예배로 전환되는 등 크게 위축된 상황이었지만, 북한선교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미션 루마니아 2018 대회는 루마니아 전 복음주의 교단과 주요 선교단체, 일반 대학이 참여해 한국교회와 공동 선교사역을 하기로 결의하는 시간이었다. ©정홍기 선교사 ㅡ코로나로 루마니아 교회 사역도, 선교도 전환기를 맞고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상황인가요.
“루마니아를 비롯한 28개 유럽연합 공동체에서는 지난 2월부터 6월까지 한국의 3단계에 해당하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됐습니다. 그 기간 루마니아도 관공서를 비롯하여 호텔 등 서비스업은 거의 다 문을 닫았고, 외출할 때도 나이별로 정해진 시간에 슈퍼마켓 정도만 갈 수 있었습니다. 슈퍼마켓에 갈 때도 자필로 쓴 자술서를 꼭 소지해야 했는데, 경찰이 거리에서 자술서를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6월 중순부터는 제한된 시간에 공원에도 갈 수 있도록 허용했고, 9월 초엔 실내 레스토랑이 문을 열었습니다. 문제는 7~8월 휴가철 때 방역의 고삐를 잠시 풀었다가 확진자가 크게 늘어 하루에 1,000명 이상씩 늘고 있습니다(23일 현재 루마니아의 코로나 확진자 11만4,648명, 사망자 4,503명, 존스홉킨스대 통계).
지난 3월에도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했는데, 당시엔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에서 일하던 300만 루마니아 노동자 중 상당수가 한꺼번에 귀국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확산 초기라 손 쓸 틈도 없이 죽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저와 선교운동을 함께 했던 루마니아 침례교 노회장도 봄에 장례식에서 설교한 지 며칠 만에 코로나에 걸려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루마니아 교회는 2월부터 온라인 예배를 드렸습니다. 저희 교회는 6월부터 2m 거리두기를 지켜 20명 미만이 교회 마당에서 야외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고, 지금은 실내에서 예배하고 있습니다.”

미션 루마니아 2018 대회에는 임현수 목사도 메인 강사로 참여해 북한선교에 대해 강의했다(왼쪽). 대회 포스터에는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북한(Coreea De Nord) 더 가까이(Mai Aproape), 남쪽의 좋은 소식이 북쪽에(N Sud, Cu Vestea Buna Spre Nord), 루마니아를 통해(Prin Romania!)라고 적혀 있다. ‘루마니아를 통해 북한에 더 가까이, 남쪽의 좋은 소식이 북쪽에’ 전해지길 바라는 루마니아 교회의 소망이 담겨있다(오른쪽). ©정홍기 선교사 ㅡ루마니아 교회가 북한선교에 관심과 열정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화된 루마니아는 1948년 북한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활발히 교류했습니다.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하자 루마니아 교회는 북한의 전쟁고아를 돕는 돼지저금통 모금 운동을 전국적으로 진행했습니다. 이후에는 루마니아로 유학 오는 북한 사람들을 도왔고, 일부 교회는 북한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사람인 제가 1997년 다른 루마니아 교회들을 방문했을 때, 북한을 위해 기도하고 있어 놀랐습니다. 알고 보니 루마니아는 민주화 혁명 이전까지 북한과 가장 가까운 형제국이었고, 루마니아 교회는 북한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루마니아 기독교인들은 농담으로 ‘악질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하나 좋은 일을 했다. 북한과 형제 관계를 맺어놓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무너진 후 루마니아는 30년간 북한과 맺었던 우호 관계를 활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복음주의 교단 총회장들은 ‘북한과의 옛날 우정을 새로 세워가자’라는 메시지를 북한에 전하길 원합니다.”

미션 루마니아 2018 대회는 김성훈 선교사(왼쪽)와 정홍기 선교사(오른쪽)가 함께 기획하고 주관했다. ©정홍기 선교사 ㅡ루마니아 교회도 공산정권에서 많은 핍박과 차별을 받았는데, 어떤 어려움을 겪었나요.
“정부 등록 교회만 활동을 허용하고 등록되지 않은 종교 행위는 이적 행위로 법의 저촉을 받았습니다. 예배는 지정된 장소, 지정된 시간에만 허용됐고, 개인의 신앙심을 표현하는 것도 금지됐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신앙을 전수하지 못하도록 18세 이하는 교회 등록이 거부됐습니다. 교회 건물조차 정부에 등록하게 하고 정부가 재산을 관리했는데, 가장 잔혹한 것은 이웃에게 ‘종교적 이적 행위’를 감시하고 신고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러한 공산주의 정책은 의도적으로 사람들이 서로 신뢰하지 못하게 하는 교묘한 정책입니다. 성도들 사이에서도 ‘누가 당신을 비밀경찰에 고발할지 모른다’는 소문을 퍼뜨려 서로 불신하고 두려워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공산주의 통치 기간 기독교인은 사회 활동이 전면 제한되고, 이류 시민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생긴 열등감은 루마니아 기독교인의 사고와 행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공산주의 시대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은 마치 장애인으로 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전도는 상상할 수 없고, 대부분 교인끼리 교제하고 어울리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삶을 살 기회가 제한당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