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독일 사례에서 미리 보는 체제 전환 후 기독교
하나의 코리아, 마산재건교회, 선교통일한국협의회 공동주관 제4회 통일선교 학술세미나

▲왼쪽부터 이수봉 박사(선통협 사무총장, 하나와여럿통일연구소 소장, 원당왕성교회 담임목사), 구경훈 목사(의령성시화운동본부 대표회장, 의령대천교회 담임목사), 조요셉 교수(선통협 상임대표, 숭실대 초빙교수, 물댄동산교회 담임목사, YWAM 북한선교연구원 원장, 하나의코리아 고문), 정종기 교수(아신대 북한선교학과 교수, 기독교통일포럼 사무총장, 한선통일목회연구소 소장, 영신교회 담임목사), 이규영 교수(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 선경최종건재단 감사, 산아시아연구소 이사회 이사). ⓒ마산재건교회
통일 과정과 통일 이후 남북의 기독교는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어떤 길을 걸어야 할까. 해방 직후인 1946년에 세워진 마산재건교회가 설립 73주년 기념주일을 맞아 지난달 24일 '체제 전환 이후 기독교의 현황과 전망'을 주제로 '제4회 통일선교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루마니아와 독일에서 체제 전환 이전과 이후 교회의 사회적 역할과 위상, 오늘날 교회의 특징과 위기를 살펴보면서 한국교회는 통일한국 시대를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이번 행사는 하나의코리아(이사장 하성암), 마산재건교회(동사목사 송영섭), 선교통일한국협의회(선통협·대표회장 김종국, 상임대표 조요셉)가 주관했다.
정종기 ACTS 북한선교학과 교수(한선통일목회연구소 소장)는 지난 11월 초 루마니아를 방문하며 만난 현지인 목회자들과 국립대, 신학대 교수의 진술, 루마니아 선교사들의 편지 등을 근거로 '루마니아 체제 전환 이후 기독교 현황과 전망'을 발제했다. 루마니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왕국이 붕괴되고 1947년 소련의 지원으로 인민공화국으로 전환됐으며, 1965~1989년 니콜라이 차우셰스쿠가 강력한 독재정권을 구축했다. 그러나 루마니아 혁명으로 1989년 차우셰스쿠가 총살당한 후 공산주의 체제에서 민주사회로 전환됐다. 현재 루마니아 인구는 2,200만 명이며, 기독교 인구는 2.4%인 52만8,000명(정부는 6.4%로 제공)이다. 개신교회 수는 약 5,400개로, 이중 오순절교회가 약 3,200개, 침례교회가 약 1,500개, 형제교회가 약 700개다.
기독교를 사회와 상관없는 종교로 만든 루마니아 공산정권
정 교수는 공산주의 체제하의 루마니아 교회에 대해 "공산정권은 무신론 정책으로 종교를 탄압했는데, 종교를 없애진 못하고 주변으로 몰아넣고 자기들끼리 종교적 활동을 하도록 했다"며 "공산당 간부들은 교회 지도자들을 가까이 두고 통제하고, 교회 지도자들은 항상 공산당의 승인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결국 교회 리더들은 공산당과 협력할 수밖에 없었고, 공산당과 협력하지 않으면 쫓겨나고 감옥에 갔다. 그는 "이 기간 공산정부는 기독교를 사회와 상관없는 종교로 만들어버렸고, 오직 교회 내에서 성도들끼리만 교제하도록 만들었다"며 "교회는 주일 오전, 오후 모임 이외에는 모임을 할 수 없었지만, 가정 모임은 공산당도 어쩔 수 없었다. 루마니아 성도들은 기도하는 모임을 가정에서 가졌고 기도하는 루마니아 교회가 되었다"고 소개했다. "이들은 기도뿐 아니라 고난이 무엇인지도 알았다. 그 결과 루마니아에서는 아주 강한 복음주의 신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그는 덧붙였다.
루마니아 공산정권은 1947년, 1948년 두 해에 걸쳐 교회 재정과 재산 및 행정 권한을 접수하면서 교회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했다. 1948년 종교부가 발표한 법령으로 개신교회, 정교회, 우니아트교회 등 모든 종파는 해산되고 재산도 몰수됐다. 학교에서는 종교 강의를 할 수 없어 이민 희망자들이 늘었고, 정부에 대한 어떤 비판이나 도전적 행위는 용납되지 않았다. 정 교수는 "차우셰스쿠의 종교 탄압 심화, 이데올로기의 강조, 권력집중 심화, 소수층 부의 독점은 대중을 더 소외시켰고, 이 과정에서 대중은 낮은 생활 수준과 기아, 영양실조 등이 심화되면서 종교는 국민에게 고난의 현실을 도피하는 메커니즘을 제공했다"고 말했다. 루마니아는 1948년 11월 북한과 수교했으나, 한국과 루마니아가 수교한 후 북한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제4회 통일선교 학술세미나 단체 기념사진. ⓒ마산재건교회
루마니아 교회에서 시작된 사회적 불만, 시민혁명으로 이어져
이날 정 교수는 "루마니아 교회가 체제 전환 이후 겪은 여러 가지 변화는 북한의 체제 변화에 대비해 북한선교에서 준비해야 할 과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1989년 루마니아 혁명이 일어날 때 사회 내 불만이 가득했으나, 조직화 된 차우셰스쿠에 대한 반대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라며 "루마니아는 단순한 시민혁명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 북한에서는 그 같은 혁명은 기대하기 어려운 것은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교수는 "루마니아에서 사회적 불만은 교회로부터 시작되었다. 라즐로 퇴게스 헝가리계 개신교 목사를 추방하려는 비밀경찰에 항의하는 성도들로부터였다"며 "퇴게스 목사는 공산당과 챠우세스쿠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교회를 일깨우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퇴출 위기에 놓였을 때 교회 성도들을 중심으로 촛불혁명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루마니아는 공산치하에 있다 하더라도 교회가 작은 단위로 지속할 수 있었지만, 북한은 기독교가 완전 축출되어 현재 관제교회나 그루터기 교회, 지하교회가 이러한 촛불혁명의 불씨를 제공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미지수"라며 "북한선교에서 지하교회와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체제 전환 후 '세속주의' '젊은이 탈루마니아' 위기 등에 직면한 루마니아 교회
루마니아 교회는 공산주의 체제에서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된 이후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정 교수는 "루마니아 교회가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지만, '세속주의'라는 새로운 도전이 다가왔다"며 "세속주의 영향으로 루마니아 교회는 물질화되고, 교인들에게는 물질만능주의가 생겨났다. 지하교회에서 지상교회로 이전했으나 신앙의 변질에 대한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도 마찬가지로 고민해야 할 문제로, 현재 북한교회의 대세가 지하교회라면 이들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지상교회로 올라올 때 이들의 신앙 변질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과거 성도였다가 핍박으로 신앙을 버린 자들이 다시 교회에 나오게 될 때, 배교자들에 대한 처분을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젊은이들의 탈루마니아'라는 새로운 현상은 루마니아 교회의 노령화와 과거의 체험적 신앙에서 벗어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 외에도 공산주의 정권 아래서 오랜 시간 개인주의화 된 기독교회가 아직까지 사회변혁과 사회봉사가 미흡하고, 사회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다.
정종기 교수는 "현재 루마니아 개신교회는 기독교인들이 사회에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증거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며 "루마니아 교회는 한국교회의 부흥성장을 배우기를 원하고, 약 50년 간 공산 치하에서의 기독교 박해를 경험 삼아 여전히 독재국가로 남아 있는 북한에 복음을 전하는 데 역할을 하기 위해 한국교회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면서 "이제 한국교회가 루마니아 개신교회와 협력하여 북한선교를 준비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공산 정권의 박해 아래에서 기독교 신앙의 명맥을 이어온 루마니아 교회 연합체인 루마니아복음주의협의회(REA)는 이를 위해 지난 5월 선교통일한국협의회(선통협)과 업무협약(MOU)을 맺기도 했다.

▲이날 발표자들과 토론자들이 질의응답 시간을 갖고 있다. ⓒ마산재건교회
동독 체제 전환 이후 '지배교회' 변질 비판, '신앙 전수 단절' 여전
이규영 서강대 교수(신아시아연구소 이사)는 '동독 체제 전환 이후 기독교의 현황과 전망'에서 "1960년대만 해도 독일에서는 주일이 되면 평균 68%의 교인이 예배당에 왔으며, 조금만 늦으면 별관, 교육관, 예배당 밖 교회 정원 벤치에 앉아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으면서 예배드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독일통일 이후 동독 내 무종교주의자(atheist)가 증가했고, 동독 시기에는 교회가 '보호의 공간'으로 감동을 주었다가 이후 주요 교회 인사와 국가보위부 간의 내통 사실이 드러나면서 성도들이 교회로부터 등을 돌리고, 교회는 도덕적, 정치적 신뢰를 상실했다"고 말했다.
또 통일 이전과 과정에서는 교회 안에서 자유로운 의견 개진이 가능하고, 교회가 비판적 기능을 하며 주민의 정치적, 사회적 관심을 대변했다면, 통일 이후에는 교회가 사회 내 공식 인정된 합법화된 기관으로 부각되면서 '지배교회'로 변질됐다는 비판을 받았고, 동독교회에 대한 주민의 매력과 동정심이 사라졌다.
이규영 교수는 "어느 순간부터 교회의 자리가 비기 시작하고, 크나큰 위기를 맞이했다. 라인 강의 기적으로 이룬 급작스러운 경제 번영과 주5일제 근무, 일부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 등이 주된 이유"라고 설명했다. 독일인 하이노 팔케(H. Falcke) 교수는 독일교회가 당면한 위기로 '소수교회로 전락' '재정위기' '중대성과 역할의 위기' '습관적 무신론과 동독 시절 비(非)교회화' '종교다원주의의 침투와 다원화된 사회로의 진입' '점점 더 정치적, 사회적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교회' 등이라고 주장했다. 독일연합교회(EK